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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개황


                       동림서원은 북송 정화원년 (1111년)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학자 양시가 장기적으로 강학을 하던 곳이다. 명나라 만력 32년 (1604년), 고헌성은 고반룡 등과 함께 서원을 복구하기 위해 자금을 기부할 것을 제안했으며 잇달아 강학을 주최하면서 대중들을 모아 학술강연을 하였다. "실학은 세상을 구한다"를 창도하고 "천하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긴다고 하며 조야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인사들에게 보편적인 추앙을 받았고 "천하 최고의 언정학자 동림"이라는 칭찬을 누리고 있었다. 고헌성이 편찬한 "바람소리, 비소리, 책읽는 소리, 모든 소리가 귀에 들리고, 집안일, 나라일, 천하의 일, 모든일을 관심한다."라는 유명한 대련은 국내외의 명성을 떨쳐 동림 지사들이 책을 읽으면서 나라의 안위를 잊지 않는 진실한 모습으로 되였다.                    

   복구된 동림서원은 부지면적이 1만 3,000 메터에 달하고 각 종류의 전시 건물15여채, 각종 양식의 편액 대련40여개가 있으며 명청시기의 서원 배치와 형상구조 및 전성기의 풍모를 재현한다. 전면 복구와 개방 이후 서원은 선후로 국가 "AAAA"급 관광지, 성, 시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에 국무원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발표하였다.

1, 서원대문

   명나라 만력 시대에 건축하였다. 총 삼영인데 방왈 동림서원이라고 한다. 원래는 원앞의 칠전하 근처였는데 그후의 하가 막혀서 문은 폐기되였고 1994년에 여기에서 재건되였다. 원래 걸어였던 대련은 “오늘이 여전히 오늘이지만 그 때의 도가 남으로 갔었다.”라고 하였다. 이 대련은 서원의 창시자인 송나라의 양시의 전고를 인용하였다. 그는 ≪오늘 다시는 얻을 수 없다 동창에게≫라는 장편시를 썼는데 학자에게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고의적으로 공부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다시는 돌아 오지 않고 다시는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명대 서원은 복구되고 다시 강학을 하였고 이런 까닭에 오늘날이 여전히 이라고 말하였다. 그외에 양시가 한번 남쪽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선생님인 정호는 그에게 "나의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 "라고 바래주었다. 그후에 양시는 동림에서 살면서 오랫동안 강의하였기 때문에 ‘당년도과남’이라고 하였다. 원련은 오래 산실되였으나 지금은 무시의 저명한 학자 전위장이 다시 썼다.

2, 돌패방

명나라 만력 32년 (1604)에 세워졌는데 서원의 표지과 상징이다. 서원 건축군의 도입부분에 위치하여 서원의 건물 전체를 두드러지게 하는 작용을 하여서 서원 건물이 엄숙하고 고박하게 만들었다. 천계 6년 (1626), 엄당의 파괴로 서원과 석패방은 동시에 파괴되였다. 명대 원돌방에 '관해래유', '낙민중추'라는 문구등이 씌어져 있었다. 청나라 강희년간에 목방을 개조하였다. 건륭 5년 (1740)에 돌방을 회복하고 방액에서 '동림구적', '후학진량'이라는 문구를 고쳤다. 이 방은 삼간사주오루식의 조직구성이 있는 건물인데 높이가 도합 7.24 메터이다. 돌방에 이룡희주, 단봉조양, 사자곤수구, 리어도용문 등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안으로 조각되여있다. 전체의 설계가 합리적이고 구조가 엄밀하여 석조건물의 진품이라고 할 만하다.

3, 반지

명나라 만력 32년 (1604)에 개착하였다. 명나라때는 이를 월하라고 불렀다. 깊이가 약 2.5 메터, 너비가 약 6 메터, 길이가 약 60 메터인데 동서로 도남사와 동림정사의 문 앞을 관통하며 반원형으로 되였고 황석 호안제 위에서 다리를 놓았다. 그의 기원은 고대 학궁 전에 뚫었던 반지의 의미와 똑같다. 명대 반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땅속에 묻혀 있다. 1994년, 명대의 반지를 발굴한 기초에서 방지와 돔형 다리로 개축했고 지금의 반지는 원월하의 6분의 1 정도밖에 안되였으며 깊이는 원래 하과 일치하였다. 이는 학술강연의 상징적 건축이다.

4, 동림정사

   여기는 원래 동림서원 안문으로 ‘의문’이라고도 했다. 만력 32년 (1604)에 건축되였다. 명나라 숭정 2년 (1629), 무시 오계삼이 이 문을 재건했고 편액에 "동림정사"라고 썼다. 정사는 곧 학사를 말한다. 오계삼은 명나라시기 동림서원이 파괴된 후 서원을 복구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첫 사람이자 동림서원의 산장, 동림학파의 저명한 학자였다. 현존하는 '동림정사', '낙민중추' 라는 벽돌조각 문액은 모두 청나라 건륭초년의 유물로서 서원 기념 건축의 역사적 증거이다.

5, 려택당

   명나라 만력 32년 (1604)에 세워졌다. 려는, 연결의 의미; 호수, 물의 뜻임. 여러 물이 서로 연결하여, 만물이 유익해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려택으로 이름을 따서 친구끼리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학술 강연을 한다는 덕담을 비유하였다. 이 당명은 고헌성이 직접 작성한 것이 바로 문으로써 벗과 사귀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 것이다. 항상 '실학' '실용' '실익'의 실속있는 학풍을 강조하였다. 천계 6년 (1626)에 이 당집은 철거되고 숭정 2년에 복구되였다. 려택당은 동림서원에서 사람을 모여서 강의를 진행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당시 오월 강남에 있는 사우들과 전국 각지의 학자동지들이 끊임없이 여기에 모여들여 토론을 벌렀는데 항상 많은 스승이 영정마당을 가득 채웠고 전례 없던 성황을 이루었다.

6, 의용당

명나라 만력 32년 (1604)에 세워졌다. 즉 「중용」의 의미에 따른 것이다. 이 당은 동림서원의 주체 건축으로 동림대회 전에 학술 례의 강연를 진행하는 곳으로 동림학파의 학술 영지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바람소리, 비소리, 책읽는 소리, 모든 소리가 귀에 들리고, 집안일, 나라일, 천하의 일, 모든일을 관심한다."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련을 고문성이 지은 것인데, 동림지사가 독서강학하며 나라의 안위를 잊지 않는 모습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이다. 이 대련은 지금 의용당에 걸려있는데 1982년에 요말사가 손수 쓴 글이다.

7, 연거묘

명나라 만력 38년 (1610)에 건축되었다. 가운데에 긴 책상을 놓아두고 위패를 모시며 지성선사 공자를 제사하기 위한 전문 사당이다. 서원은 사회 사가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인데, 부현 학궁 공자의 '대성전'과 구별되기 때문에, 사당이 '연거'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대전의 동서 양측에는 각각 전적실, 제기실이 있는데 서원의 경적 도서 및 제기 악기를 전문적으로 저장하는 곳이다.

8, 만취산방

   청대에 건설되어 민국36년 (1947)에 중수되었는데 현재 건축물은 1994년에 원위치에서 복원되였다. 서원의 강학 서재 중 하나이다. 만취는 일반적으로 겨울이 지나가도 여전히 생생한 초록색을 유지되는 나무나 해가 서쪽에서 기울어갈 때 검푸른 경관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이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건물이 서원의 주체 건축의 중축선 서쪽에 있는 회랑 밖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후자의 의미와 비교적 가깝다. 산방은 본래 산중의 가옥을 가리키는데, 여기는 그윽하고 조용하여 책을 읽는 곳을 말한다. 이 건물은 세 칸의 권붕정이 있다. 안에서 전대에 쓴 '만취산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9, 래복재

명나라 숭정 2년 (1629)에 건축되였다. 1994년에 다시 복구되였다. 동림산장이자 저명한 학자인 오계삼의 서재이다. 천계 6년 (1626), 엄당화란이 발생하여 동림서원은 도남사를 제외한 기타 건물들이 전부 해체되었다. 숭정제가 즉위한 후 동림서원을 복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당시 사람들이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모두들 감히 호응하지 못하였다. 무시의 오계삼은 이 명령을 아주 기쁘게 받았고 개인적으로 려택당과 서원 내의 대문을 수선하기 위해 기부하였는데 이름을 동림정사라고 하였다. 려택당의 서쪽에 래복재 3 칸을 세워 동시에 동림서원에서 강학하는 일도 주관하였다.    “래복”은 동림 강학이 곧 회복된다는 의미를 비유하여 이른다.

10, 심락처

의용당의 서쪽에 자리 잡았고 청나라 건륭 2년 (1737)에 금궤 지현인 왕윤겸에 의해 창설하였다. 찾아온 학자들이 걱정이 없어 편안하게 숨쉬기 위한 곳이다. 심락처는 읍인 화예원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청대에는 이를 락처, 현락처 또는 심락재 등이라고도 하였다. 왕윤겸의 저서로는 ≪심락재기≫가 있는데 이는 반복적으로 탐구하여 선현의 오지를 터득하면 거기에 즐거워진다는 뜻이다. 교사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하다.

11, 재득초려

청나라 순치 11년 (1655), 무시의 고세태에 의해 창건하였다. 초려는 양시가 지은 시 ≪오늘 다시는 얻을 수 없다 동창에게≫로 명명되였다. 청나라 초기 학자이며 동림서원의 산장인 고세태가 독서강학의 중요한 장소이다. 고세태는 고반룡의 조카로서 명나라 만력 32년 (1604)에 태여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간 뒤 '동림서원 30여 년 주관'하여 강학했다. 그는 청나라 강희 16년에 73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정혁시기에 동림건축을 복구하고 경학의 진흥하기 위해 선대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요한 인물이였다. 그리고 청나라 옹정 간본인 ≪동림서원지≫도 옹정 10년 3월 상순에 이 재득초려에서 원고를 편집하였다.

12, 단비재

의용당 우측에 위치하여 있다. 청나라 건륭 2년 (1737), 금궤 지현인 왕윤겸에 의해 구축했다. 청나라 옹정 4년 (1726), 무시현 동쪽에서 금궤현을 설치하였다. 왕윤겸은 부임한 이듬해에 이 재을 구축했고 향읍의 사자들이 기예를 배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 재는 청대 정식으로 수업을 마치고 거업을 하는 곳으로서 서원의 강학이 관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음을 표시했다. 이 건물이 구축된 때는 마침 여름 5월이였는데 날씨가 오래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금방 낙성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읍신 화예원이 “단비재”라는 이름을 썼다. 왕윤겸은 ≪단비재기≫를 편찬하였다. 이는 지방 관부가 강의소를 건설하고, 스승과 학자를 증가하고, 인재 양성을 중시하는데에 대한 구체적인 반영이었다.

13, 도남사

명나라 만력 32년 (1604)에 건립하여 서원의 창시자인 송나라 양시 및 그의 제자 문인을 모시기 위한 전문 사당으로 되였다. 양시가 남쪽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의 선생님인 정호는 그에게 "나의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 "라고 바래주었으니, "도남"으로 이 사당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도학을 남쪽으로 전파하려는 의도였다. 이 사당은 당년에 관부 자금으로 지어졌으며 무시의 지방 향현사 중 하나이다. 명나라 천계년간에 엄당이 서원을 파괴하는데 도남사만 보존되였다. 대문, 전당, 향당 등이 남았다. 도남사에는 송대의 양시 및 명청시기의 동림학자 등 약 80여명을 모셔져 있었는데 모두 관부의 허가를 받고 사당에 들었다. 선현을 표방하고 후학을 격려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동림이 강학을 개방하니, 각지의 관원, 학자 등이 모두 사당에 들어가고 선현들을 참배하였다.

14, 정심정

무시에서는 옛날부터 스승을 존경하고 교육을 중시하여 독서의 풍습이 매우 성행하였다. 정심정 내에 걸려 있던 편액은 원래 무시의 공자묘 앞의 패루에 있는 편액을 모방하여 복사되었으며 원래의 편액은 지금 무시시 박물관에 있다. 현액에 세워진 정표한 사람들은 모두 무시의 역대 과거시험 중에서 출중한 인물들이다. 우시에서는 총 장원 5명, 방안 3명, 탐화 6명, 진사 600여 명이 있었으며 “일방구진사”, “육과삼해원” 등 미담도 지금까지 전해왔다. 동림선현인 고헌성, 고반룡, 엽무재도 그중 한 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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